1890-1905 비스마르크 체제의 해체기
비스마르크 체제의 붕괴 원인
외부적 요인
- 힘의 분배상태 변화: 독일의 급속한 국력 팽창
- 보장체제 내 러시아의 도태
- 애초에 이질적이던 동맹망이 분열
- 제국주의적 팽창 갈등: 3B vs 3C
- 산업화 진전으로 유럽 열강들은 외부 시장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짐
- 19세기 후반의 대불황
- 전통적 비밀외교를 통한 각국 이익의 조정이 더 이상 불가능해짐
- 오스만 터키의 쇠락으로 인한 힘의 공백1)
- 프랑스의 적극적 고립탈피 정책
- 이탈리아의 줄다리기식 이중외교
독일 내부 요인
- 비스마르크라는 한 인물에 의존한 보장체제
- 비스마르크 실각2) 이후 동맹체제의 유연성 붕괴
- 너무 복잡해서 비스마르크 이후의 정책결정자들이 보장체제의 이해, 유지관리에 실패
- 홀슈타인의 외교장악: 독러 재보장조약의 무용 주장
- 빌헬름 2세의 세계정책(WeltPolitik), 해군확장 수행(티르피츠 계획)
- 자본 팽창으로 인한 계급갈등
- 군사국가화로 인한 군부강화
1894 러불동맹
배경
- 1891 러시아 시베리아 횡단철도 착공
- 러시아가 프랑스로부터 차관 도입, 러불관계 개선
- 러불협정3) 체결
내용
함의
- 나중에 영국이 가입하여 삼국협상(Triple Entente) 구성
- 러시아는 기나긴 외교적 고립으로부터 탈피
- 러시아의 해협 진출 시도가 좌절되고 페르시아만, 극동으로 눈을 돌림
1902 제1차 영일동맹
배경
- 1899 보어전쟁에서 영국 육군의 취약성 폭로됨
- 독일이 양쯔강 합의가 만주에 적용되지 않음을 주장. 이는 러시아의 만주 점령을 인정하는 꼴
- 영국이 동아시아에서의 러시아 견제를 위해 찾은 대안이 일본
- 일본의 편승정책
내용
- 방어동맹적 성격
함의
- 유럽국제정치 문제가 유럽 밖으로 확장됨
- 영국의 splendid isolation policy 포기
- 일본의 러일전쟁 수행 배경이 됨
1904 영불협상
배경
- 1898 파쇼다 사건4):
- 아프리카 대륙에서 영국의 종단정책 vs 프랑스의 횡단정책의 충돌
- 이집트령 수단 남부 파쇼다에서 영국군과 프랑스 군 맞닥뜨림. 프랑스 철수로 위기 종식
- 대독일 공동전선을 위해 식민팽창을 자제한 것
- 영국-프랑스 간 식민지 확보 경쟁 중단
- 1899 보어전쟁: 영국 육군의 취약성 폭로됨
내용
- 군사동맹은 아님. 우호관계, 식민지 경쟁의 종식
- 프랑스의 동맹국인 러시아, 영국의 동맹국인 일본으로 인해 전쟁에 연루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목적
- 당시 러시아-일본은 식민지 세력범위의 의견조정중5)
- 영국은 이집트, 프랑스는 모로코에 대한 영향력을 가짐을 상호 인정
이후 새 질서의 형성
- 독일을 중심으로 하고 프랑스를 배제한 다각적이고 유연한 비스마르크체제가 붕괴되고, 독오이 삼국동맹, 영프러 삼국협상의 양극 구도가 형성되기 시작함
- 이후 새 질서 형성 과정에서의 사건들
- 1907 불일협상, 1~4차 러일협약