1930-1938 히틀러 나치의 부상과 팽창
- 베르사유 체제에 대한 불만, 1929 대공황으로 독일 사회 불안
- 히틀러가 “강력한 지도자”로 급부상
1930 나치당의 부상
- 나치당 =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당
- 목표: 범게르만주의, 자유주의와 의회주의 반대, 마르크스주의 섬멸, 유태인 추방
- 1930년 9월 선거를 통해 사회민주당에 이은 제2의 정당으로 대두
- 1932년 의회 내 최대다수당이 됨
1933 히틀러의 독일 수상 취임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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- 공산당 불법화, 공산당원 체포, 공산주의 혁명에 대한 공포를 확대재생산
- 히틀러를 '메시아'로 선전
- 독일 의회 해산, 재선거 실시하여 반대세력 제거
- 베르사유조약에 따른 배상금 지불 중단
1933 나치 수권법 통과
- =전권위임법. '민족과 국가의 위난을 해소하기 위한 법'
- 나치당 주도로 수권법 가결
- 의회 스스로 의회민주주의를 포기한 것. 형식적 법치주의의 자살이라고도 불림
- 표면적으로 합법적인 법률 제정, 통치방식을 유지
- 수상인 히틀러의 포고령이 곧 법이 됨. 히틀러=절대권력자
- 이후 히틀러와 나치당의 권력장악. 야당, 연립여당 전부 해산. 독재체제 구축
1935 재군비 결정
- 바이마르 공화국 때부터 암암리에 시작한 재무장을 적극적으로 추진
- 재무장 프로그램으로 실업문제 해소
[국제관계사], 박건영
히틀러의 경제 정책은 군비확충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고, 또한 그것들은 그의 “위대한 독일”이라는 정치적 사상적 군사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상호 연관되고 보완적인 수단이었다.
- 1933.10 군축회의3) 탈퇴, LN 탈퇴
- 1934 재무장 선언
- 영국, 프랑스, 소련 등이 군비를 증강하고 있음을 명분으로 재군비 결정
[국제관계사], 박건영
영국과 프랑스는 히틀러의 의도를 알 수 없었고, 어떤 면에서는 반공주의자인 그가 쓸모가 있을 수도 있다고 판단하였다.
[Diplomacy], Kissinger
The tenets of the balance of power should have made it clear that a large and strong Germany bordered on the east by small and weak states was a dangerace threat. […] The West should have spent less time assessing Hitler's motives and more time counterbalancing Germany's growing strength.
- 1935 자르 지역 주민투표로 독일에 귀속
- 1935 공군(Luftwaffe) 보유 공식 선언
- 1935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스트레사 선언
- 로카르노 조약의 재확인, 오스트리아 독립 유지, 독일의 베르사유조약 수정 시도 불허용
- 1935 영독해군협정: 독일이 향후 10년간 영국해군 함정 총 배수량의 35% 이하의 함정을 보유할 수 있음
- 독일 억지를 위한 영불협력의 기초를 흔듦. 스트레사 합의의 사실상 무력화
- 독일 해군력의 제한4)을 풀어줌
- 베르사유조약 붕괴를 재촉
1936 라인란트 진주
배경
- 1935 프랑스-소련 상호원조협정
- 호어-라발 안:
- 무솔리니에게 아비시니아의 2/3을 넘긴다는 내용
- 독일 저지를 위한 이탈리아 협력을 얻기 위해 제안
- 이것이 누설되자 협정 무산, 무솔리니가 스트레사 합의 파기 선언
내용
- 1935 불소협정을 구실삼아 이탈리아가 스트레사 합의에서 이탈한 상황에서 1936.3재무장 시도
- 로카르노 조약 제1조 위반. 베르사유 체제의 완전한 붕괴
- 이후 독일 육군 참모본부는 오스트리아, 체코 침공을 위한 녹색작전(Operation Green) 수립
영국과 프랑스의 반응
- 1차대전 후 경제적, 군사적으로 취약.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전쟁에 휘말리지 않겠다는 입장
- 프랑스: 별다른 반응 하지않음
- 독일군의 역량 과대평가. 총동원이 보장되지 않는 한 군사적 대응은 무리라고 판단
- 영국이 미온적인 상황에서 총동원 실시 불가하다 판단
- 영국: 베르사유 조약 위반 비난에 그침
-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하지 않는 한 중대조치 불가능하다는 입장
- 1936 독일-일본-이탈리아 반공조약체결에도 “임박한 위협”이 없다는 입장 유지
- 히틀러 독일이 공산주의 억지에 기여할 것이라 기대
함의
- 프랑스: 영국의 무기력, 이기적 대응 목격. 영불동맹에 의문을 품음
- 이탈리아: 친독노선으로 선회
- 1936 베를린-로마 추축(axis) 선언
- 이탈리아가 중부유럽에서 독일 견제 역할을 맡지 않기로 한 것
스페인 내전
- “인민전선”에 반대한 군부쿠데타 발생
- 영국/프랑스는 공화파 원조하지 않음. 소련만 원조
- 영국: 내전 초반 '공산주의자'의 승리보다는 오히려 '파시스트'의 승리를 선호
- 프랑스: 국내정치 혼란, 영국의 압박
- 히틀러는 국민파 원조
- 이념적 동질성
- 영국, 프랑스 - 아시아, 아프리카 식민지 간 교통방해에 스페인이 유용하다고 판단
- 프랑코 승리
히틀러의 성과
- 라인란트에 이어 스페인 내전에서도 영국과 프랑스가 개입하지 않음
- 영국이 자신보다 소련을 더 혐오하고 두려워함을 확인
- 소련도 자신과 싸우고싶어하지 않음을 확인
- 파시스트 정권간의 연대
- 스페인: 반공조약 가입
1938 오스트리아 병합
- 독일, 오스트리아 지역의 국민투표(97% 찬성)를 통해 합병
- 투표 예정일 하루 전에 오스트리아 나치당 쿠데타로 권력 장악
- 영국과 프랑스는 저지하지 않음
관련 기출문제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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