1931 만주사변
배경
- 중국 동북부 지역의 힘의 공백 상태
- 1929 대공황: 수출에 의존하던 일본에 직격탄
[국제관계사], 박건영
장기적으로 침체한 경제가 정치 사회적 불안을 야기했고, 이에 따라 정부와 재벌은 전쟁을 통해 경기를 회복하고, 중국의 자원과 시장을 동시에 확보한다는 정책대안을 개념적 차원에서 수용한 상태였다.
- 일본의 인구과잉, 영토부족, 자원부족 문제의 해결책으로서 만주점령이 떠오름
- 다이쇼 정치의 부패와 무능 부각, '강력한 리더십'의 군부가 부상한 상태
이시하라 간지의 전략구상
우리 조국은 북쪽에서는 러시아의 침략을 저지해야 하고, 남쪽에서는 영국과 미국의 해군력에 직면해 있다. […] 일본이 이 북만주 지역을 장악하면, 러시아는 동쪽으로 진출하기 어렵게 된다. […] 조선에 대한 일본의 통제도 안정될 것이다. […] 중국에 대해 지도국의 입지를 확보할 수 있고 […] 1)
내용
류타오후 사건
- 관동군2)이 선양 인근의 류타오후에서 자국 관할이던 만주철도를 스스로 폭파, 중국의 소행이라고 뒤집어씌움
- 중국 항일운동이 만주로 파급되는 것을 막고, 일본의 전시체제로의 재편을 꾀함
- 철도 보호를 구실로 만주 점령
- 1932년 2월 만주 북쪽 도시 점령 후 푸이를 집정에 취임3)시키고 3월 1일 만주국 건국
LN의 대응
- 당시 중국은 내전중. 국민당 정부가 군사적 대응 대신 LN에 제소
- 국제연맹규약 제15조4)에 따라 소집된 특별총회가 <리튼위원회> 권고 채택
- 일본의 만주 점령을 불법으로 규정했으나 제재를 가하지 않음
함의
- 일본이 본격적 파시즘 체제로 전환
- 1933년 일본이 LN 탈퇴
- 1차대전 전후처리 - 대공황 - 만주사변의 흐름이 우연한 사건의 나열이 아님에 유의할 것
- 워싱턴 회의, 대공황을 거치며 당시 일본의 대외정책 결정권을 군부가 갖게 됨